복도에까지 소음이 마중 나와 유난히 부산스럽다. 미닫이문을 열고 자리를 찾아 착석하니 어깨를 감싸 오는 잭의 손끝이 일정하게 움직인다. Verny, 오늘 복학생 온대. 한껏 업된 목소리로 문장을 내뱉는 잭의 손을 붙들고 내게서 떼어냈다. 쉽게 떨어져나간 잭이 이번에는 한쪽 다리를 달달 떤다. 소문 장난 아니던데. 관심을 가지고 자기 말을 들어 달라는 잭의 속뜻을 간파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책상 서랍 속 정갈하게 정리된 교과서 중 하나를 꺼냈다. 필기에 필요한 검정색, 빨간색 펜과 노란색 형광펜까지 셋팅을 끝마치니 잭이 기어코 옆 분단 여자아이를 시끄럽게 불러댄다.
“제니, 그애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지만 잭의 크나큰 목소리가 노래 소리를 뚫고 들어왔는지 질문에 대답하는 제니의 모습이 영 심드렁하다.
“Joshua.”
맞아, 조슈아. 존나 잘생겼는데 남자랑 씹질 하다 걸려서 정학 먹었다더라? 미국 학교에서 정학까지 먹을 정도면 얼마나 심각했다는 거야. 낄낄거리는 잭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어질 때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금세 고쳐 앉는 잭을 바라보다 혀를 내두르며 칠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복도쪽 불투명한 유리창 건너로 두 개의 인영이 걸어온다. 하나는 담임 선생님, 나머지 하나는 아침부터 화두의 중심인 복학생이겠지. 쓸데없이 동반하는 편두통에 나는 신께 부디 피곤할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수백 번 빌었다.
나인틴 (Nineteen)
홍지수 최한솔
썸머
나는 어떠한 일에 엮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학교 생활도 적당히 가치관이 맞는 최소한의 몇 친구들과만 함께하고, 기숙사 룸메이트와도 굳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기 싫어 카페테리아에서 몇 시간씩 뻐기다 들어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노멀하지는 않은 이유로 정학을 먹어 복학하는 조슈아라는 인간과 굳이, 아니, 절대 말도 트기 싫었다. 싫었는데,
“아, 미안.”
분명히 책상 옆으로 삐죽 나온 발을 보고 그 옆으로 걸음을 떼는데, 무릎 높이로 발을 들어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기어코 넘어지게 만든 그가 가당치도 않은 사과와 함께 웃는다. What the. 하마터면 지독한 욕설을 내뱉을 뻔한 걸 간신히 삼켜냈다. 모든 시선이 교실 한가운데서 자빠진 나에게 집중된다. 제일 질색하는 상황이었다. 나에게로 내민 손을 한껏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어질 때 딱딱한 교실 바닥에 부딪친 무릎이 꽤 욱신거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교복 바지를 털어냈다.
“Vernon, 맞지?”
이어진 물음에도 입을 꾹 닫은 채 조슈아를 지나쳐 맨 뒷자리에 앉았다. 사과와 질문까지 씹힌 주제에 완전히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을 마주하려는 광경이 더욱 짜증을 증폭시켰다. 쳐다보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앞자리 학우와 자리를 바꿔 나와 마주보고 앉는 조슈아는 빌어먹게도 잘생겼다. 애써 무시하며 교과서를 소리나게 내려놓고 진도 나갈 부분의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하지만 조슈아에 의해 다시 닫혀진 교과서를 집어드려는데 예상치 못하게 손목이 잡힌다.
“아.”
표정을 잔뜩 구겼다. 다시 한번 그의 가증스러운 웃음이 터진다. 거세게 쥐어오는 악력에 잡힌 손목이 얼얼해질 때쯤, 조슈아의 눈이 보기 좋게 잔뜩 휘어졌다. 그리고는 잡은 손을 놓는다. 빨갛게 부어오르려던 손목이 다시 제 살색을 되찾는다.
“너 아버님이 한국분이시라며.”
“그건 어떻게.”
“우리 부모님은 둘 다 한국분이시거든. 같은 부류끼리 친하게 좀 지내자고.”
응? 되묻는 조슈아의 손이 이번에는 내 볼을 향해 다가온다. 차마 피하지 못하고 맞닿은 촉감에 기분이 금세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신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빌고 빌었는데 재수 없게 엮이게 된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그는 겉모습부터 아시안이었고, 나는 명백한 아메리칸이었는데 어째서 우리 아빠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거지. 그 사실은 한 손에 꼽는 친구 몇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날의 그 일을 기점으로 교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남자랑 씹질 하다 정학 먹은 게이 조슈아가 버논을 찍었다, 따위의 듣기 싫은 것들. 어디 가든 따라붙는 시선을 피하려 애써도 결국 끝에 조슈아가 있었다. 그는 친하게 지내자는 한마디와 매우 대조적으로 앞장서 나를 괴롭히는 것에 힘썼다. 다리를 거는 건 약과였으며 체육복 숨기기, 복도로 의자 빼 놓기 등의 빈도가 일종의 악취미 수준으로 잦았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잘못 짚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받아들이는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버논, 옆 반 캐비닛 위에 네 교과서 있더라.”
잭이 여러 권의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묻지 않아도 조슈아 짓이었다. 쎄한 감각에 이를 바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에 있는 내 캐비닛의 문을 열었다. 크기별로 정리해 꽂아 놓은 교과서는 반이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처럼 잔뜩 쌓여 있는 건 웬 정사각형 모양의 은색 껍질들이었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리저리 모양새를 살피고 난 후에는 전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나는 교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 자리에 앉아 있는 뒤통수를 노려보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터치하며 시시덕대는 조슈아의 얼굴로 그것을 던졌다.
개수조차 셀 수 없는 것들이 그의 얼굴에 맞고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조슈아의 한쪽 눈썹이 꿈틀댄다. 가장자리의 뾰족한 포장 때문인지 뺨에 금방 붉은 생채기가 졌다. 휴대 전화를 책상 위에 올려 둔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 바퀴 돌린다. 그리고는 시선이 마주쳤다. 좆같이도 조슈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내 맑게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 줄래, Verny?”
귀여워, 버니. 양손을 머리에 맞대며 토끼를 묘사하는 듯한 행동에 단단히 어이를 상실했다. 넋빠진 나를 가리키며 소리내 웃는 것이 꼭 정신 나간 또라이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한 채 나뒹구는 것들 중 하나를 집어든다. 그리고 껍질을 벗겼다.
“Oh, shit.”
내용물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끝으로 꺼내든 조슈아가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을 띄운 채로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하며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보기만 해도 미끈한 그것은 콘돔이었다. 평소처럼 논리정연하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fuck. 그저 낮게 욕지거리를 짓씹는 나의 귓가를 때린 말에 기어코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딸기향으로 넣어 둘 걸 그랬나.”
분명히 조슈아의 왼쪽 뺨을 응시하며 주먹질을 했는데 쉽게 피해 버린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위로 넘어지는 꼴이 됐다. 금세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소름이 돋았다. 눈치는 개나 줬는지 휘파람을 불어대는 잭의 목을 따야 할까,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몸을 비틀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양손으로 단단히 허리춤을 감는 행동에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생각보다 강한 힘이었다. 전에 넘어졌을 때처럼 교실의 시선이 집중된다. 열려 있는 뒷문으로 옆 반 동급생들까지 관전하는 상황이 연출되니 딱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보다 자유로운 다리를 들어 조슈아의 발을 꽉 밟았다. 그제서야 아, 하며 나를 놓는 손길이 아직까지도 개구지다.
“이딴 장난 치지 마요, 이 개새끼야.”
“한국어로 욕하는 게 더 꼴리는데.”
킥킥대는 조슈아의 말뜻을 알아듣는 건 한국말을 구사할 줄 아는 나, 잭, 제니뿐이었다. 제니는 이어폰을 손에 쥐고 나와 조슈아를 바라보다 이내 귀에 꽂은 뒤 교과서에 고개를 처박았고, 잭은 뭣 같은 내 표정을 스캔하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 파악이 됐나 보다. 뒷문으로 다가가 옆 반 아이들에게 Go away, 따위의 말을 그제야 지껄인다. 문이 닫혀 복도와 차단되자 교실 안의 공기도 한층 수그러들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꼴에 한숨을 내뱉었다.
“저 좀 그만 괴롭혀요.”
“남자랑 자 봤어?”
맥이 탁 풀린다. 중점을 빗겨가는 조슈아를 받아낼 기력조차 없었다. 제가 미쳤어요?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말끝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지만 간신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으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마음먹은 건 일 분 만에 처참히 깨져 버렸다.
[수업 끝나고 기숙사 앞에서 보자]
두어 번 접힌 쪽지의 발신인은 조슈아였다. 삐뚠 글씨가 그와 닮아 있었다. 이를 앙 물고 노려보자 또 실없게 웃어 버린다. Shit. 그것은 또 다른 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이렇게 된 거 아예 담판을 지을 예정이었다. 우리 아빠가 한국인인 건 어떠한 경로로 알게 되었고, 대체 나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저의는 무엇이며,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말자는 나름의 마무리까지 세웠다. 기숙사 앞은 지나가는 학생 없이 한산했다. 검은색의 컨버스 앞코를 바닥에 여러 번 찍을 때쯤, 익숙한 형체가 거리를 좁혀 온다. 한 손을 느릿하게 흔드는 것조차 보기 싫었던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버렸다.
“쌩깔 줄 알았는데 의외네.”
금방 귀를 파고 들어온 조슈아의 목소리가 의외로 차분하다. 수업 시간 때까지만 해도 목 끝까지 잠겨 있던 교복 와이셔츠의 단추가 지금은 두어 개 풀어져 있다. 아, 내가 이렇게까지 조슈아에게 관심이 있었나. 단지 그를 질색해서라는 합의점을 찾은 뒤 조슈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잖아. 네 방으로 가자.”
다른 장소를 물색할 틈도 주지 않고 혼자 내린 결론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기가 찬다. 제발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먼저 발걸음을 뗐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꽤 가까이서 따라 걸어오는 그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 부디 내일부터라도 엮이지 않게 해 주세요. 믿지 않는 신께 올리는 두 번째 기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룸메이트는 방에 없었다. 익숙하게 먼저 불을 켜는 손길을 노려보았다. 아, 나도 기숙사 살아서 그래.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해 오는 그의 행동에 답지 않은 웃음이 터졌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두 개의 침대 중 용케 내 침대를 알아냈는지, 아무 생각 없었는지 그대로 뻗어 버리는 그의 행동에 꽤 높은 억양으로 터져 나오는 내 목소리가 공중에 울린다.
“왜 보자고 했어요?”
“아, 그게 궁금했구나.”
“저 묻고 싶은 거 많아요.”
뭔데?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금세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조슈아가 느긋하게 대답한다. 그는 항상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눈을 내리깐 건 내 쪽이었다.
“우리 아빠 한국인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아.”
글쎄? 생각보다 배로 짧은 대답에 나도 모르게 표정을 찌푸렸다. 장난하나. 낮게 읊조릴 때쯤 조슈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어울리지 않는 기지개를 켠다. 그게 다야?
“저 왜 괴롭히는 거예요.”
직설적인 물음에 조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 소리가 방을 가득 메꿨다. 왠지 모를 소름이 끼쳤다. 그게 궁금했어? 억양은 이질적으로 부드럽다. 이쪽으로 걸음을 좁혀 오는 것을 인지하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좁아 터진 방에서 더 이상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어깨와 등이 딱딱한 벽에 맞닿았다. 그와의 거리는 이십 센티미터 남짓이었다.
“눈에 띄길래.”
“그러니까 왜,”
“예쁘잖아.”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에 실소가 터졌다. 그는 정말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표정 변화를 읽었는지 진짜인데, 하고 덧붙이는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한솔아.”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한솔, 한솔.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근 3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가, 어째서.
“나 문 잠그고 들어왔다?”
그가 내 턱을 부여잡음과 동시에 입술이 닿은 건 한순간이었다.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갔다. 그는 도대체 누구길래, 내 이름을 알고 있지. 헐렁한 와이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감촉에 아, 하는 소리를 내뱉자 열린 틈 사이로 침투하는 혀가 말랑하다. 상황 파악이 될 리 없었다.
“남자 처음이지.”
떨어진 입술에서 길게 타액이 늘어진다. 나는 아직까지도 뭐라 내뱉을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눈의 초점조차 잡지 못하는 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건드렸다.
“가르쳐 줄게.”
씨발, 신이시여. 앞으로는 정말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조슈아는 기어코 내 와이셔츠 단추를 완벽하게 푸른 뒤 자신의 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와르르 떨어진 것들에 기어코 헛웃음이 터졌다.
“쓰자.”
내 사물함에 있던, 조슈아의 얼굴을 맞추고 떨어졌던 그 콘돔들이었다. 진짜 또라이구나. 뒤이은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이 입을 맞춰 오는 조슈아 때문에 나는 결국 온몸에 힘을 빼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정말 어쩔 수 없이,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올리는 기도는 그저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다.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지 조슈아가 소리내 웃고 맨살로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춰 나갔다.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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